Art Criticism

自然-그 영원한 話頭

강석진 2019.04.08 09:06 조회 373

박 찬 선 / 시인


강화백이 이사한 화실을 보러 상경하는 차창에는 먹구름이 자욱했다. 비가 오지 말아야 할 텐데 속으로 되뇌이며 도착한 서울. 서울에 들어서기만 하면 불현듯 일어나는 두통은 지레짐작에서 오는 습관성이다. 환경에 재빠르게 적응치 못하는 시골 사는 사람의 거부반응이라고 할지.
예민한 두통은 강화백의 화실에 닿자마자 삽시간에 싹 가시어졌다. 인왕산 어진 얼굴이 가까이에 있고 북한산이 점잖게 정좌하고 있는 서북쪽 풍경이 창에 담기는 강화백의 화실. 그림이 약이었다. 그의 그림이 진통제 역할을 한 것이다. 나는 풍경을 그린 대작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1995
년 12월에 첫 개인전을 할 때 ‘풍경 속의 길 찾기와 삶의 승화’라는 제목으로 감상의 졸문을 쓴 적이 있고 2000년 9월에 두 번째 전시회 때는 ‘미의 본향을 찾아가는 강 석진의 미술세계’를 주제로 하고 부제를 ‘길과 고향과 나무를 중심으로’라고 하여 역시 감상의 일단을 피력하기도 했다. 2004년 3회 개인전 때 낸 화첩에 ‘回歸의 美學’이라고 이름 붙여 감상문을 썼었다.


“강형 올해 몇이지?
 “나는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있어. 해가 가면 한 살씩 주어지는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어

 “나도 그래. 甲 지나고 나서부터 나이를 먹을 일을 해야지 한 살씩 오르기로 했는데 아직
…”
이미 고정된 일력에 따른 산법을 무시하고 외면한 채 살아가는 동갑내기의 생각이 공교롭게도 딱 맞았다. 이제는 자연적인 상태로 돌릴 수 밖에.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는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사람은 땅에 발을 붙이어 땅에서 생산된 곡식을 먹고 살고 땅은 하늘이 내려주는 햇살과 비를 맞으며 하늘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고 하늘은 우주만물을 지배하는 보편적 길, 즉 天地人 三才를 포괄하는 도를 본받아야 하며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아 최종적 본성을 완성하게 된다.
자연을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은 인간의 합리성이 극한에 도달했을 때 그것을 초극하는 최후적 발설이요 그 발설이란 초합리적인 개방이다.자연은 ‘그냥 둠’(Let it be)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함’으로 언어가 단절된 언어요, 논리가 단절되는 논리요, 합리를 초월하는 ‘스스로 그러함’의 질서인 것이다.


노자의 자연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자연과는 다르다.인간의 외적 경험 대상의 총체로서 물리적인 자연세계가 아닌 인간의 의식에 대상화되어 의미화되기 이전의 세계자신이 지닌 존재 상태를 형용한 것이다. 이 때 자연은 필연적으로 ‘無爲’의 개념을 자체적으로 안고 있다. 무위란 ‘함이 없는’ 어떠한 강제력이나 특정한 작위를 배제하는 행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무위는 ‘처사’하는 일종의 방법이며 자연은 무위가 드러내는 일종의 효과이다. 무위란 모든 인간중심적인 분별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중심의 대립적 편파적 작위가 지양된 대립과 갈등을 초월한 ‘無不爲’적인 것이다. 따라서 무위를 통하여 드러내는 세계가 자연이다. 자연은 곧 무위이다. 자연에 대하여 오만과 독단의 폭력을 행사하는 현대인들에게 자족의 족함을 일깨운다. 특히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근원으로 삼고 있는 서구적 자연관에 경종을 울린다.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은 老子의 중심문으로 人, 地, 天, 道, 自然의 중심개념을 연결해줌과 동시에 인간과 자연의 상승적 구도 상관된 논리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노자의 자연관을 예로 든 것은 강화백의 그림이 그대로 맥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 속에 인간은 아주 작은 자연의 일부로 그려져 있다. 좀더 과장하자면 넓고 큰 자연 속에 극히 미미한 개미 같은 존재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그의 풍경화의 변화중의 변화에 해당한다. 그의 그림은 ‘열려진 그러함’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그림이 열려있기에 오염 공해 기상이변이 있는 공간을 그대로 드러낸다. 우리가 처하고 있는 환경은 스스로 그러함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최근의 환경문제는 인간이 이용하면서 변화된 것을 원상태로 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함의 세계로 복귀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근저에 강화백의 그림은 자리 잡고 있다.


그의 그림에 알맞은 낱말을 고른다면 풍경, 시내, 강, 무논, 물, 밭고랑, 바람, 나무, 흙, 길, 산, 고향 등 이러한 낱말이 된다. 넓게는 ‘자연'이란 한 낱말로 포괄이 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앞서 쓴 글에서 이것들이 중점적으로 언급이 되었다. 특히 길, 고향, 나무를 중심으로 그의 그림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그의 그림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있는가를 바로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몇 부분을 줄여 보기로 한다.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풍경이었다. 줄줄이 모심기를 마친 무논에 흘러가는 구름도 잠기고 뻐꾸기 울음소리도 솟아나는 굽은 논두렁이 누워있는 정경. 황토가 얼비치고 고랑이 줄지어 선 산골마을의 비탈 밭. 해지도록 붕어와 모래무지를 잡으며 미역감고 놀던 시내가 맑았다. 이것은 그가 태어나서 자라난 고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러한 농촌풍경은 그의 그림의 중심구도에 자리 잡고 있는 정경이다. 더러는 지구촌 여러 곳의 산하와 도시를 그린 작품이 있지만 그것 또한 산이나 들, 사람 사는 마을을 그렸으니 그는 풍경화가이자 자연화가이다. 자연을 소재로 한 풍경화는 진솔한 삶의 현장성과 자연의 영원성을 추구함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풍경 속의 길 찾기’는 애초 그림의 출발부터 나타났었고 그것이 회를 거듭할수록 차츰 심화 확대되었다고 하겠다.
‘나무의 신성함을 알고 나무와 이야기하고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은 진리를 아는 사람이며 삶의 근본 법칙을 아는 사람이다. 나무의 이미지가 지닌 여성성(모성성)과 남성성인 兩性性의 면보다는 인간심성의 ‘정신적 에너지’ ‘생명력’과 ‘지향성’(우주의 중심부를 바라보고 있는 향일성)과 불멸의 관념으로 이어지는 ‘영원성’, ‘풍요성’을 감안하면 나무는 삶과 미의 원천이고 숙명의 주인으로의 파악이 가능해진다. 그의 나무에 대한 탐구와 연민의 정은 이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나무와의 교감을 통해서 얻어지는 건강한 자연미는 넘치는 생명력과 함께 우리에게 삶의 활력을 솟구치게 할 것이다. 그는 나무를 사랑하고 가슴에 무수한 나무를 키우며 사는 화가이다
.’
이렇게 파악하는 나무와 물. ‘물은 상상력의 변용이며, 시간이며, 생명이며, 죽음으로부터 재생이며, 성적인 환희로 상징된다.’는 물. 그리고 향토적 요소와 고향의 이야기가 쉬지 않고 솟아나는 대상으로서의 산은 풍경 속의 일부에 불과하다.


나무, 물, 산과 함께 빠트릴 수 없는 것이 흙이다. 한자의 흙 토(土)는 초목이 땅위로 나올 때 싹에 흙이 묻어 있는 모양을 그린 상형문자이다. 흙은 생명과 소생과 죽음을 상징하고 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생명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일러준다. 그리고 흙은 고향과 조국, 자연과 본향을 상징한다. 또한 흙은 생명을 낳고 거둬들인다는 점에서 모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동양의 음양오행설에도 토는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우주나 인간사회의 모든 현상과 만물의 생성소멸을 음양과 오행(金木水火土)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행의 소장(消長)과 변전(變轉)으로 풀이하는 학설이다. 그 중에 토는 토용(土用), 중앙(中央), 황(黃), 신(信), 심(心), 감(甘), 직(稷), 우(牛)를 나타낸다
.
흙의 색은 누른 황색이다. 황색인종, 황금, 건강한 사람과 아기의 똥빛, 황토방, 어느 정당에서 선호한 빛깔이 이것 아니던가? 그런데 그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 황색이라고 했으니 핵심의 한 가지는 열려진 셈이다. 그의 작품 ‘우리의 산하’와 ‘낙동강’에 주조를 이룬 색은 농염과 명암의 차이는 있으나 푸른색과 함께 황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황색은 흙의 빛, 성숙의 빛, 평화의 빛이다. 황색은 온화함의 빛이요 권위의 빛이며 귀착점의 빛이다. 황색은 건강의 빛이요 한국적 정서와 한국의 색이자 천재화가 이인성의 색이기도 하다.


그러면 이제 ‘길’로 넘어가 보자. 그는 분명히 자기가 안주할 세계를 그리면서 삶의 길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그림 속의 길에서 저마다 생각만큼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게 됨은 확실하다. 그 길은 분명 희망의 길이요, 광명의 길이며, 내일을 열어 가는 빛의 길이요, 사람들이 낸 역사의 길이며, 사람들이 마땅히 걸어 갈 사람의 길일 것이다. 그는 그의 내면적인 자기의 원리이자 색깔로 자기의 길을 걷고 있다. 그는 길의 화가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 길에 인생의 연륜에서 오는 짙은 의미를 간과 할 수 없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이치를 거부하거나 거역할 수 없는 순리 앞에 우리는 숙연한 자세를 가지게 된다. 처음 강화백과의 대화에서 나이 물음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운명적으로 타고난 존재의 물음이다.자연이 주는 세월의 구속에 구애받는 나이가 아니라 내가 좌우하는 인위적 나이, 나아가 무위의 자연에 합일하는 나이임에랴.

 
화가로서 강화백이 맞이하는 구경의 경지는 고향이다. ‘고향은 그의 미적 세계의 토양이며 이상이요,발원처이자 귀의처이다. 그에게 고향은 아름다움의 원천이자 본원으로서 자리잡고 있다. 고향은 그가 추구하는 예술세계의 형상과 질료로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가하면 ‘흙과 하늘, 물질과 정신의 조화를 이룬 이상세계인 고향으로의 귀환이 그의 마지막 귀착점이다. 고향은 미적 대상 즉 아름다움의 원형이자 모태로서 그가 한결같이 찾아가는 목적지이다.’ 넓게 보면 고향은 곧 자연이다. 우리가 와서 살다가 돌아갈 곳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고향 즉 자연의 일부를 화폭에 담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우리가 가 있을 현장을 담고 있는 것이다. 육안(肉眼)이 아닌 심안(心眼)이나 영안(靈眼)으로 본 자연은 그만큼 정갈할 수밖에 없다. 인간에 의해서 더럽혀진 자연이 아닌 본디의 자연,거기로 돌아감이 친자연의 환경운동과 다름아니다.그의 친환경 친자연적 작업은 우리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강한 메시지이다.


네 번에 걸친 “두고온 별, 우리의 山河”에 나온 전시 작품은 강석진식 구도요, 기법이요, 화법에 의해서 제작된 작품이다. 지속적인 국내외 전시를 통해 우리 화단 일각에서 그것을 공감하고 인정할 정도가 되었으니 그의 그림의 특성을 일러주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그가 줄기차게 보여준 전시 작품들은 소재면에서 일관성을 지녔다. 이것은 물론 외관상의 시각에서 본 것이지만 동일 소재에서 받는 유사성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분명히 할 것은 그림의 유사점과 상사점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지구촌 곳곳의 풍경으로 정체(停滯<.strong>)가 아닌 발전과 원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여유 있게 세상을 관망하는 넉넉한 자세에서 비롯되며 동일 소재에 대한 작가의 탐구정신과 불꽃같은 집요한 집념의 소산이다. 마치 해와 달, 호박. 물방울, 하늘과 바다만을 그리는 화가가 있듯이 단순히 편집적(偏執的)인 행위로 보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것은 반성이자 모색이며 본래적 자아와 도법자연으로 돌아감이다. 우리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영혼의 소진(消盡)이자 정신의 고갈이라고 한다. 가령 보리밭을 그릴 때에는 보리알 하나 하나가 영글어 터지는 최후의 순간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 말에서 짐작이 간다. 작품에 쏟는 열정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우주는 원환(圓環)운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인간의 생(生)도 지상의 환희와 고민을 지니고 영원히 회귀한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회귀한다.’고 했다. 영겁회귀(永劫回歸)로 일컫는 이 사상은 불가의 인연취산(因緣聚散)과도 무관치 않을 것 같다. 인연에 의해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가는 우리네 삶. 이 세상에 몸을 받아 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주어진 일을 하다가 돌아가는 삶. 특히 그의 그림은 우리가 돌아갈 곳을 거듭거듭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열려진 자연을 표출하고 있지 않는가?그에 있어서 자연은 영원한 화두로 자리잡고 있다.
 
그의 이번 작품전의 표제가 “두고 온 별, 우리의 山河”는 우연이 아님을 알겠다. 그가 추구하는 세계는 ‘두고 온 별’로의 회귀에 있다. 영원히 존재할 빛나는 별로 돌아감에 있다. 노자가 말한 현빈(玄牝)의 도가 가득한 ‘우리의 山河’인 무위자연으로 돌아감에 있다.
갈 길을 알고 준비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당당하고 멋이 있다. 그의 사우 맞는 삶과 미의 잔치에 부치는 도법자연의 세계는 이 시간 우리와 함께 있다. 따가운 여름 햇살을 받으며 장독대 옆에서 붉게 피는 봉숭아와 전원의 풋풋한 풀향기와 함께 있다.




2009년 8월 槿谷齋에서

글쓴이 朴贊善 蒔人<.strong> 강석진과 소년시절부터 친구이며 그들의 고향 상주에서 문화(詩作)활동을 하고 있다. 상주고등학교 교장으로 오래 몸담아 그는 퇴임 한국펜클럽경북회장과 동화나라 상주 이야기축제 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돌담쌓기』, 『상주』, 『세상이 옻을 먹게 한다』, 『도남가는 길』 등의 시집과 산문집으로 『환상의 현실적 탐구』 『상주이야기』 있다.
수상은 흙의 문학상, 경북문화상,제1회 상주시문화상,대한민국향토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