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온 별, 우리의 산하
김영재 (미술사상가, 철학박사)
강석진은 오랫동안 한국의 산하를 그려왔다. 그것은 두고 온 어느 별에 대한 송가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시각이 주종을 이루는 그의 작품은 성경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다 볼 때 좋았었다.”라는 사물을 넓은 마음으로 바라보는 흐뭇한 심경을 담고 있다. 나아가 그 세계는 지극히 좋은 세상, 이를테면 극락을 닮았으되 저 세상의 것이 아닌 이 세상의 낙원을 표방하고 있다. 어느 종교의 어느 교리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종교가 함께 빚어내는 이상적인 세계... 그것이 그림의 흐름을 만들고 있다.
산과 들판을 그린 그림에는 산 사람을 위한 산소가 가득하다. 녹색은 작가에게 산소를 의미한다. 새벽공기는 산소를 담뿍 머금고 있다. 산소는 물이 있어 축축한 생명을 기른다. 그래서 강석진은 녹색을 가장 많이 쓰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산소가 녹색과 녹색의 산하에만 있을까. 작품마다 풍성하게 배어 있는 산소는 메마른 티베트의 고원, 물에 잠긴 유럽의 도시에도 있다. 강석진의 이상향이 현상을 뛰어넘은 저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려지는 그림은 어떤 그림일 것 같은가. 캔버스에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넓은 시야가 펼쳐진다. 작가는 그 시각을 지구라는 별을 내려다보는 시각이라 표현한다. 거기에는 지구별과 한국의 정감 어린 물 논, 산과 강, 그리고 인간의 집이 그려진다. 또한 지구의 여러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냄새가 풍기는 풍경이 그려진다. 하느님, 혹은 하나님의 시각을 닮았으되 그 그림에는 인간의 희로애락, 혹은 우비고뇌 (憂悲苦惱)가 담겨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본 하느님의 시각이거나 하느님의 자손이기에 이 땅을 굽어보는 부감 시각이 도입된다.
‘그림과 싸움은 멀리서 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강석진의 그림은 2ⁿ의 거리에서 보라’는 말이 적합할 것 같다. 최소한 그림을 감상하기에 좋은 2-3미터의 두 배인 5-6미터의 거리에서 보거나 하늘나라 저 먼 곳에서 내려다본 시각... 그 시각에서 볼 때 강석진의 그림은 제 모습으로 보인다.
사랑으로 내려다본 산하... 그것이 작가의 그림이다. 그 산하란 바로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이름의 별이며, 언젠가 이 지구별을 떠나 그가 왔던 별로 돌아갔을 때 그리워하게 될 마음을 두고 온 별, 지구의 대자연과 산하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화면에는 한국인의 조상들이 언제나 그랬듯이 그 아름다운 산하의 별 아래 잠들어도 좋다고 느끼면서 살고 그리고 그림으로 옮기는 작가의 심경이 표현된다. 그러므로 그 그림에는 한국인이 죽음을 귀천(歸天), 혹은 온 곳으로 되돌아감(逝去)으로 표현하는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고 있는 셈이다.
귀천(歸天)이라는 시가 있었다. 천상병 시인은 ‘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답다고 말하리라’ 했다. 자연 속에서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려지는 강석진의 그림은 자연찬가이면서 생명찬가이고, 나아가 인간찬가라 할만하다. 자연찬가라 함은 자연 속에서 완전히 동화되었을 때 비로소 구도가 떠오르고, 그 느낌을 그림으로 그리는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생명찬가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삶을 누리는 생명체의 환희를 그림에 담는다는 뜻이다. 인간찬가란 그 어느 인연이기에 너와 나 살던 별을 두고 오늘 이 별에서 만났는가... 라는 인간적인 추억을 그림에 담는다는 뜻이다.

두고 온 별을 그리는 그림에는 마음의 눈으로 내려다본 세계가 펼쳐진다. 작가는 그 세계를 눈을 감고 가슴과 마음으로 본 세계라 표현한다. 마음의 눈으로 우주와 지구별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는 사람도, 들판도, 모두 인간의 냄새가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보자 했을 때, 현실에서 눈을 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인간적인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지구를 보자는 뜻으로 해석된다. 물에 잠긴 도시를 보듯, 하나하나의 슬픈 현실을 볼 때는 슬프지만 대자연의 시각으로 본 수중도시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위대한 자연의 창조이며 최고의 예술작품이다. 마치 하늘이 인간을 사랑하시어 물에 잠긴 도시에 하늘의 얼굴을 판박이로 찍어놓은 듯하지 아니한가. 그것을 본다.

현상은 현상이되 그 현상의 뒤에 숨은 세계를 본다. 하나하나의 사물들의 조합으로서의 큰 화면이 아니라 큰 틀에 비추어진 작은 사물들을 읽는다. 그렇게 풍경은 하나하나를 담지하면서도 전체를 포괄하는 거대시각으로 표상된다. 그러니까 세계를 모방하여 작가의 세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가슴에 투영된 세계가 그려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위기라는 이름으로 표상 될 수도 있겠지만 전체와 부분의 절묘한 조화에서 이루어지는 원융의 세계이다. 그것은 거대한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동화되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것이 풀 한 포기, 돌 하나에도 애정을 갖는 작가만의 세계일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하나의 세계를 들여다보되 총체적인 시각으로 내려다보는, 그리고 재구성되는 강석진의 스케일 큰 화면이 구성된다. 강석진 화면의 심리적 스케일은 바로 우주적이라 할 수 있는 스케일로 연결된다. 세상의 모든 대지를 다 차지하려는 듯한 스케일의 구도를 화폭에 담고 있다. 보는 것이 그림이 되는 세계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위빠사나가 그러할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관(觀)한다 라고도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관한다는 것은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요해한다는 뜻이다. 사물의 철리에 사무쳐서 방안에 앉아 천리를 꿰뚫는 이른바 천리안적인 시각을 의미한다. 관이라, 불교적인 해석이다.
위빠사나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사방에 두루 편재하고 모든 사람에게 깃들일 수 있으면서도 화엄경의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만난 관세음보살을 닮았다. 선재동자는 생떽쥐베리가 어린 왕자의 모델로 삼았다는 구도자이다. 그리고 강석진이 두고 온 별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린 왕자의 시각과 다르지 않다.

화엄사상은 원융사상이다. 사리분별이 없는 세계이다. 큰 우주의 법칙이 있겠지, 그러나 그 세계조차도 작은 티끌과 원융한 세계이다. 의상법사가 그랬다. ‘한 티끌 속에도 시방세계가 들어 있다’고 했다.

강석진의 세계가 그럴 것이다. 부분으로서의 자연을 그리되 그 속에는 대우주가 있고, 나아가 언젠가 자신이 돌아갈 세계로서의 자연이 있다. 그리고 다시 대우주는 작가가 찍는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어 산이 되고, 물이 되고, 그리고 길이 된다.
그렇게 강석진의 그림에 어린 왕자의 순방이나 선재동자의 역정을 닮았다고 느낄 수 있는 대목에는 어김없이 길이 있다. 그림마다 등장하는 길, 그것은 흘러가는 선이다. 어딘지 미지의 곳으로 사람을 이끄는 길이다. 미지의 땅에는 환상이 있다. 어딘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좋은 길이다. 어딘지 모르니까 더욱 뭔가 있는 것 같은 길이다. 만나면 끝까지 가보고 싶은 길이기도 하다. 그것은 어린 왕자의 길이고, 선재동자의 길이고, 강석진이 화구를 메고 순례자처럼 걸어왔던 길이며, 그 화업이기도 하다.
어린 왕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별을 바오밥나무에 내어주고 세상을 순방한다. 선재동자는 자신을 내던져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선다. 53선지식을 만난다. 그것은 진리를 향한 수행계위라 일컬어진다. 어찌 53개의 계위만 있을까. 무한의 수행과정 중에서 표상적인 53계위를 보여주면서 무한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 입법계품의 사상이며 보현행원의 아미타친견사상으로 연결된다. 친견은 핑계이고, 세간적 실지-즉 현실적인 목적이 있다. 바로 극락왕생이다. 보현행원이 극락의 문이라면 선재동자는 극락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고 어린 왕자는 뱀에 물려 죽음을 통해 별들의 순행을 마무리 짓는다. 강석진의 두고 온 별은 다시 돌아갈 별이 된다.

강석진은 국토순례와 아울러 우리의 산하를 닮은 세계의 오지를 돌면서 그린 그림들마다 고향회귀의 염원을 담는다. 그 순례는 사람이 사는 곳만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산 자나 죽은 자, 인간이나 인간이 아닌 것들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작가는 러시아의 페테르부르그에 갈 때마다 즐겨 찾는 공동묘지를 이야기한다. 도심의 근린공원으로 가꾸어진 묘지들은 정감이 있다. 거기에는 망자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도 있다. 언제나 싱싱한 꽃다발도 있다. 그 사이를 거닐면서 작가는 죽은 혼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곤 생각한다. 아하, 저 세상이란 참 편한 곳이구나. 경관도 좋고 이렇게 산 사람들의 세계와 가까운 곳이구나... 한다.

대화는 작가와 세계를 이어주는 핫라인이다. 묘지석에 새겨진 망자의 생전모습을 떠올려 대화를 하는 것은 소극적인 대화라 한다면, 아예 산책길에서 대화를 나누던 나무들이 베어져 땅 바닥에 뒹굴 때 그것을 화실에 옮겨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적극적인 대화라 할 것이다.

언제나 산책길에서 그를 기다려왔고, 반겨주었던 나무들을 작가는 쓰다듬어주고 캔버스에 옮겨왔다. 생명을 찬미하는 소리로 가득하던 나무들이 어느 날 손과 발이 잘리고 상처투성이가 된채 땅위에 뒹굴고 신음하더라... 그리곤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토막들의 상처 난 흙투성이의 몸을 씻어주고 화실에 옮겨왔더니 이제는 화실에서 나를 기다린다... 고 작가는 회상한다. 나무는 죽어서도 살아있는 나무처럼 화실에서 작가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이니 죽음과 삶이 어찌 둘이랴.

무속에서의 저승이 그러할 것이다. 산모퉁이 너머에 있는 것이 저승이란다. 한국 속담에는 대문 밖이 저승이라, 혹은 살고 죽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등의 표현이 있다. 그러고 보면 강석진의 그림마다 그려지는 길은 막혀있는 듯 하면서도 미지의 그 어딘가에로 연결되는 길이다. 강석진의 길은 화면에서 끊어진 듯 보일 수도 있지만 시각에 따라 화면의 뒤쪽에서 이어질 수도 있는 길이다. 그 뒤쪽에 누가 있던가. 바로 우주의 창조자인 위대한 자연이 있지 않은가.
그토록 생과 사의 길이 하나로 통하기에 티베트의 고원을 그린 삭막한 풍경에도 길이 있어 정겹다. 그것은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새먹이로 환원하는 조장(鳥葬)으로 망자(亡者)를 저 세상에 보내는 티베트의 장례식장에서 본 길이 아니라 ‘그 어느 산모퉁길에 고운님 날 기다리는 듯’ 한 한국인의 저승관이다. 그 저승이 어딘가.

‘먼 훗날 어느 먼 별에서 나는 내가 살아온 이 땅, 내가 두고 온 이 산하를 그리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위해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라고 작가는 쓰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가 말하는 두고 온 별은 언젠가 이 땅을 떠나 지구라는 이름의 별로 갔을 때 그리워하게 될 이 땅, 그러니까 지구를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지구찬가는 오늘도 한 화가의 풍경화에서 관중에게 속삭인다. 여기가 지구다... 라고

글쓴이 김영재 미술 사상가는 한국 미술과 문화의 원형전신을 추구하고 있으며 한국미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려불화와 화엄사상성 연구로 동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서울대, 고려대, 숙명여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강석진의 작품활동과 그의 미술세계를 꾸준히 지켜보아왔으며 제1회 개인전과 제2회 개인전의 작품에 대한 평론을 썼다.